공민왕릉

공민왕릉은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정릉(正陵)으로 이루어진 쌍릉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민(恭愍)’이란 시호는 1385년(우왕 11)에 명나라에서 보낸 시호입니다. 원래 시호는 1376년에 후계자인 우왕이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려 ‘경효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북에서는 ‘경효왕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현릉은 서쪽, 정릉은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봉명산 무선봉의 산 중턱 남쪽 능선에 남향하여 있고, 앞쪽에는 서쪽에서 시작되어 동남쪽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어 풍수지리를 살펴 입지를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말의 왕릉 형식을 대표하는 공민왕릉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시대 왕릉 양식의 원형으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릉은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이 직접 설계하여 9년에 걸쳐 축조하였습니다. 현릉과 정릉의 내부는 석실구조를 지녔으며, 현릉 묘실 동벽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는 석문이 있어서, 정릉과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실의 벽과 천정에는 각각 12지를 상징하는 인물과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봉분은 12매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각각의 병풍석에도 12지를 상징하는 인물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봉분의 주위로는 난간석을 돌렸고, 난간석의 바깥으로는 돌 호랑이와 석양을 번갈아 가며 배치했습니다. 봉분 아래쪽으로는 망주석과 장명등 그리고 문무인 석상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경효왕릉은 러일전쟁 기간인 1905년 일본에 의해 처음 도굴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도굴되어 온전한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1956년 수리공사 착수와 함께 현릉이 발굴되고 정비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정자각은 1980년대 후반 개성 일대 유적을 정비하면서 복원하였습니다. 

정자각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북측 국보유적 제152호)’가 있는데, 광통보제선사는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입니다.